수필

『 하루 인연 』

일흔너머 2012. 4. 21. 13:21

 

 

 

늘 그랬지만 올해 봄은 유난히 반갑습니다.
아마 변덕스런 날씨 탓인가 봅니다. 하긴 언제는 그렇지 않은 해가 있었습니까마는 계절의 끝자락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저 겨울이 끝났거니 여길 정도로 따뜻하다가 또 언제 봄이 왔던가 싶을 정도로 찬바람이 몰아치곤 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난날을 잊고 올해만 그런가 여기며 유난을 떨기 때문은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심의 열기로 벚꽃은 이미 졌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집사람과 차를 타고 나섰습니다. 보현산, 물론 산에 오를 정도로 집사람의 무릎이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영천댐을 두르는 길에는 벚꽃이 늦게 피는 까닭에 그걸 즐기러 간 겁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댐의 물이 찬 공기를 만들어 진달래도 이제 겨우 피었고 벚꽃은 보기 좋을 만큼 봉오리와 꽃이 반반씩 섞여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머잖아 동네를 온통 꽃대궐로 만들 복사꽃이 진한 꽃분홍을 띠고 망울져 있었습니다.


늙은이가 주책이랄까 봐 사람들이 없는 임도로 차를 끌고 들어가 햇빛이 좋은 곳에다 자리를 폈습니다. 주위에는 절벽에 매달려 애처롭게 핀 진달래며 길바닥에 퍼질러 자리잡은 앉은뱅이 꽃, 질경이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취나물들이 우리를 흘겨보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이제 봄이 완연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쉬엄쉬엄 점심밥을 먹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자리에 드러누워 낮잠을 한바탕 즐겼으면 했지만 화남면의 산아래 꽃들이 궁금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과일나무를 너무 작은 걸 선호합니다. 사과도 그렇고 자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무란 것이 오래되어 그 덩치가 커지면 관리가 어려워 그렇지 운치는 대단합니다. 특히 자두나무는 시커먼 몸이 꾸불꾸불 휘어져 늙은 노인이 곧게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 같지만 막상 오늘 같은 봄날 하얀 꽃을 구름처럼 머리에 이고 서있으면 이건 누가 보아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노인의 온통 하얗게 센 머리칼이 검은머리가 한둘 섞여서 히끗히끗한 것보다 오히려 더 고귀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천지가 환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온천을 들렀습니다.
몸을 씻기보다는 즐기는 마음으로 한 시간 정도 넉넉하게 쉬는 겁니다. 집사람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어 나오려는데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노인들이 단체로 입장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보던 일이라 그저 대수롭잖게 나와서 수건으로 몸에 물을 닦고 있는데 아무래도 낯이 익은 분이 저만치 있었습니다. 유심히 살피니 바로 요즘 불교방송에서 「즉문즉설(卽問卽說)」을 하여 유명한 법륜 스님이었습니다.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지만 알몸으로 합장을 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스님도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쉽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습니다. 그저 잠시 몇 마디 나누었지만 여느 스님들과 다르다는 걸 대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하는 스타를 만나 사인을 받고 어쩌고 하는 그런 기분을 가지기 보다 이상한 인연에 그저 흐뭇한 순간이었습니다.


아쉬운 봄날 하루,
금방 피어난 꽃들을 안고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또 하루 잊지 못할 인연을 만들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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