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신선(神仙)을 만나다. 』

일흔너머 2012. 5. 20. 15:30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손녀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다. 김밥 두어 줄 사서 물 한 병 넣고 나가면 손녀를 데리러 가야하는 오후 세시까지는 자유다.


누가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한창 신록이 우거지는 산야를 둘러보며 이곳 영양의 시골길을 달리면 거칠 것이 없다. 신호대기가 있나 차량정체가 있기를 하나 그저 천천히 달리며 먼데 산이나 들을 둘러보면 이 보다 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영양에서 봉화로 가는 국도 35번, 영양터널을 지나면 바로 일월산이다. 지금껏 왼쪽으로 가서 산의 정상 쪽으로만 갔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으로 눈에 오른쪽 입구가 좋아 보인다. 생각 없이 핸들을 돌려 들어가니 어라, 보기보다는 입구부터가 아늑하다. 우람한 낙엽송이 길가에 사열을 했는데 그 그늘을 지나는 기분은 숲의 향기로 인해서 더욱 아늑하다.


우선 차를 길옆에다 세우고 김밥만 들고 걷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도 사람은 없었다. 무슨 광업소라는 곳에서 낯선 우리를 보고 짖어대는 서너 마리의 개를 만난 것이 다였다. 조금 더 지나 반반한 곳을 찾아 점심을 먹으려는데 허름한 농가가 나타났다. 말이 농가지 요즘 흔히 보는 철판에 스티로폼을 입힌 패널로 지은 두어 칸. 하지만 앞에는 제법 너른 밭이 있고 두릅이 흐드러지게 심겨있었다. 그 옆에서 한참 좋은 햇빛을 안고 두 양주가 고추 묘를 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했다. 우리는 이럴 때 없는 말도 일부러 만들어 호감이 가도록 약간의 너스레를 떤다. 그런데 일하던 두 노인은 들은 척도 안하고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손을 털고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집사람과 나는 말을 걸었으니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리고 들어가는 노인을 따라 들어갔다.


노인은 허름한 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자신이 앉은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앉으란다. 그리고 안노인은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비닐봉지에 한약같이 담긴 「액기스」를 가위로 먹기 좋게 가장자리를 잘라서 내밀었다. 노인은 본보기를 보이듯 쭉 마시고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몸에 좋은 것을 다 넣어 만들어 두고 자신들도 먹고 오늘같이 손님이 오면 대접도 한다고 했다.


우리는 가지고 간 김밥 세 줄과 바나나 몇 개를 내놓고 노인은 부엌에서 피감자를 전자레인지에 삶아 왔다. 그럭저럭 조촐한 점심상이 마련된 셈이다. 시원한 물 한 잔씩 앞에 두고 서로 권하며 함께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노인이 워낙 고운 얼굴이라 연세가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바깥노인이 올해 팔십이란다. 손을 보니 약간의 수전증이 있기는 했지만 방금 햇빛을 받으며 일하던 얼굴이라 건강한 혈색에 땀이 흥건히 배어 정말 건강해 보였다.

 
늘그막에 이런 좋은 공기 속에서 별다른 걱정 없이 매일 땀흘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건강을 유지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찐 감자를 함께 나눠 먹는 두 양주는 큰 욕심 없이 지금껏 신선같이 살았으리라. 하지만 어쩌다 지나며 잠시 한번 쳐다보니 신선(神仙)놀음이지 그들의 일상은 외롭고 고독했으리라.


아내가 물었다.
"처음 들어오셔서 불편하고 적적하지는 않았습니까?"
보통은 공기가 맑고 조용하다고 전원생활을 꿈꾸며 산골로 들어와 좋아라하다가도 몇 달, 아니 며칠이 지나면 불편하고 적막한 환경에 실증을 느낀다. 지난 해 바닷가에 집을 마련하고 지내본 경험상 우리는 그런 답을 원했다.

 

그러나 부인이 한 답은 우리와 달랐다.
"처음에는 무슨 짐승이 나올까 걱정이 되어 밤만 되면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한 삼 년 지나니 지금은 여기가 오히려 편하고 외지에 나가면 불안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겨우 산골 생활에 적응되었다는 걸 말한다. 흔히 없으면 죽고 못 산다며 결혼하는 요즘 사람들 그러나 몇 년 안 되어 성격이 안 맞아 어쩌고 하면서 이혼하는 그런 세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처음에 좋아하다가 시간이 지나 싫증이 난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니 점점 좋아지는 옛사람들의 느긋한 성정을 여실히 드러낸 말이다.


보통은 바다나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막상 좋아하는 그 바다나 산에다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몇 달 아니 며칠만 지나면 넌더리를 친다. 도시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급하게 변하는 물질문명에 젖은 습관 탓이다.
우연히 지나가던 길손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한 지기가 되어 온갖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었다. 자식들 이야기, 농사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뭐 꼭 정해진 주제도 아니고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고즈넉한 산골, 멧새 울음이 간간이 들릴 뿐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의자를 당기고 자리를 고쳐 앉아 제법 거리가 있는 앞산의 소나무 숲을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짧은 추녀끝자락을 쓰다듬고 내려오는 오월의 화사한 햇빛을 안고 있으니 정말이지 신선(神仙)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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