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인덕션 」

일흔너머 2020. 11. 25. 10:01



열정과 패기 거기다가 고집 하나로 젊은 날을 버티고 신혼 살림을 차렸습니다.

70년대에도 물론 전기밥솥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일본의 코끼리 어쩌고 하는 걸 사려고 줄지은 사진이 신문에 까십거리가 되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여자는 연탄불에 냄비로 밥짓는 기술을 가지고 결혼해야 한다는 나의 신조는 신혼살림에 전기란 말이 붙은 건 얼씬도 못하게 했습니다.
친구들이 사준 14인치 조그만 흑백 TV가 유일한 전기 제품이었습니다.

연탄불에 밥하고 급하면 석유 곤로(곤爐-일본말)에 된장 끓여 함께 하던 방 하나 이천 오백 원짜리 삭을 셋방이 그리운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십여 년이 흘러 아이들 셋을 키우며 겨우 가스렌지란 걸 알게 되었고 도시가스를 설치한 것이 육십 중반의 일입니다.

세월이 살같아서 그 세 아이가 짝을 얻어 손(孫)을 낳고 그 손들이 학교에 다니는 지금 전기렌지를 설치 합니다.

지난 날 생각없이 그렇게도 오래 마신 연탄가스, 석유곤로의 연기는 얼마나 해로웠는지 모릅니다. 그저 치열했던 삶의 작은 그늘일 뿐입니다.

이제와서 새삼 연기가 건강에 해롭다고 전기렌지를 설치 합니다.
이름하야 '인덕션'.
불꽃도 없이 뜨거워서 물이 끓는 마법을 부립니다.

마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앞에서 사십 년 가까이 쓰던 부엌을 뜯어 고친다고 함께 살던 개미 무리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어찌 합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웃으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손도 대지않고 코를 푸는 시대가 아닙니까? 인덕션 바로 아래에는 '식기세척기'라고 설거지까지 해주는 녀석이 엎드려 기다립니다.

집사람은 자기가 먼저 가면 늙은 영감쟁이 설거지한다고 어설프게 꾸물댈 게 눈에 선하다며 세척기를 설치하는 이유를 웃으며 얘기 합니다.

결혼 사십 여 년이 지나고 이제 우리는 죽음을 태연하게 농(弄) 할 정도로 늙었습니다.

불꽃없이 뜨거운 '인덕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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