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손대지 마라 』

일흔너머 2011. 4. 7. 11:52

 

 

 

 

번호가 02로 시작되는 전화가 걸려오면 받기가 망설여진다.
그 중에 친구나 뚜렷한 용건이 있어서 오는 전화도 있지만 대부분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어쩌고 하면서 녹음된 카드회사 선전 문구가 들려오거나 사채회사에서 돈을 빌려가라고 하는 쓸데없는 짓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02로 시작되는 전화번호가 뜨는 것이다. 그것도 아침에 요란한 벨소리를 울리면서 말이다. 마음에 내키지 않아 시큰둥한 목소리로 겨우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도 낯선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말을 약간 더듬거렸다. 가늘고 어눌한 목소리에 생소한 여자였다.

 

이름을 묻고 본인 확인을 하더니 사학연금 잡지에다 나의 글을 싣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전에 연금수급자 코너에다 올린 나의 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마른 오징어'라는 제목의 글이란다.

 

최근에 쓴 글 중에 그런 제목으로 쓴 것은 없는데 하며 속으로 의아해 했지만 'MP3'라는 말을 하기에 '아, 그 글을 이야기하는구나.'싶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마 약간은 수정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하지만 지면관계로 약간씩 수정을 하는 경우를 당해 봤기 때문에 뭐 별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사학연금지'에 올라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기가 막혔다.
적어도 몇 십만 부의 출판물에 나의 글이 게재된다는 기쁨은 온데간데없고 실망감만 가득했다. 마음대로 제목도 바꾸고 또 제목에 맞게 수정을 하다가 보니 마지막에는 사족 같은 글을 덧붙일 수밖에 없어서 결국 지은이의 의도는 무시한 엉뚱한 글이 되고만 것이다. 편집자는 도대체 글을 읽고 그 뜻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담당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렇게 바꿀 수 있는가. 어이가 없었다.
 
낯에 확인하고 부글부글 끓던 속이 밤까지 계속되었다. 잠을 청하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나중에는 이 잡지의 편집자는 학교나 옳게 다녔는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자 문득 떠올랐다. 이래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나무라다가 결국 내가 나쁜 사람이 되고 말지. 차라리 스스로를 주저앉히고 참으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누가 글을 싣겠다고 하면 무조건 승낙해서는 안되겠다. 다른 건 몰라도 글을 고친다면 사양해야겠다. 약간이라도 수정 운운하면 무조건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해야겠다. 글이 좋아서 싣고 싶다면 그대로 좋아하라고 수정은 사양해야겠다. 
딱 하나 '내 글에 손대지 마라.'는 조건을 걸어야겠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해당화(海棠花) 』  (0) 2011.08.30
『 반짝반짝 작은 별 』  (0) 2011.05.04
『 맛이 다르다 』  (0) 2011.04.01
『 복 담는 집 』  (0) 2011.02.18
『 MP3 』  (0) 201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