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해당화(海棠花) 』

일흔너머 2011. 8. 30. 21:09

 

                   [ 백령도 몽돌해안에는 해당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물론 까다로운 보호를 받으며 무리지어 있었습니다... ]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 온 총각 선생님
열 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받쳐 사랑한 ……♪'

 

노래제목이「섬마을 선생님」이라 사범대학을 다닐 때 속칭 우리들의 '교가(校歌)'였다. 체육대회나 등반대회 같은 단체 모임에서 응원가처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참 무던히도 부르던 노래다.

 

하지만 그때는 아쉽게도 해당화가 어떤 꽃인지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저 섬에 가면 바닷가 어디쯤 있으려니 여겼다. 누구나 그렇지만 젊을 때는 그런데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어느 후미진 외딴 섬마을에 총각선생이 발령을 받아 학교에 나타나고 그 총각선생을 순수한 토박이 처녀가 흠모하게 된다는 흔히 있을 법한 그런 이야기라는 것 외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우연히 정말 우연히 동해 바닷가를 걷다가 해당화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7번 국도를 달리다 '화진'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면서 둘러본 바닷가에서 보았다. 그것도 눈이 아닌 해당화의 고혹적인 향기에 코가 낚인 것이었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해당화의 매력은 꽃보다 향기다. 꽃은 그렇게 썩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누구나 한번 보면 단번에 빠져드는 그런 매력이 없다. 자그마한 키에 그것도 가시를 덮어쓴 덤불 속에 띄엄띄엄 불거져 나와 핀 꽃을 보노라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수더분한 자태다.
 
다만 노오란 수술을 감싸는 꽃잎은 여인의 입술같이 가냘프고 부드럽다. 너무 붉지도 또 그렇게 희지도 않아서 흔히 말하는 꽃분홍색을 띤 그 옛날 선술집 아가씨 같은 꽃잎 다섯 장, 그 하나 하나가 맑고 선한 여인의 품에 안긴 듯 고혹적인 향기를 휘감고 달려든다.

 

요즘 산책을 나가면 철지난 해당화를 만난다. 공원 울타리 후미진 비탈에 세상 고민을 혼자 안고 사는 양 거미줄을 덮어쓰고 두어 송이 피어있다. 말이 통한다면 달래주고 싶다. 슬그머니 다가가 멍들어 떨어진 꽃잎 두어 장을 주워 윗도리 호주머니에 접어 넣는다. 숲길을 걸으며 하소연처럼 풀어내는 해당화 그 향기로운 숨결에 귀를 기울인다. 향기는 마치 숨바꼭질하듯 숨었다가는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가는 숨고 하면서 한 발 한 발 집까지 따라온다.

 

그러나 개울 하나 건너고 갑자기 나타나는 자동차 한 대 피하다보면 호주머니 속의 꽃잎은 첫사랑처럼 날아가고 잊어버리게 된다. 결국 윗도리 호주머니란 망각의 늪에서 기다림에 지친 꽃잎은 시들고 멍들어 화석같이 마른다.

 

이 마른 꽃잎은 집사람이 빨래를 하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다가 바싹바싹한 부스러기로 발견되곤 한다. 물론 부스러기는 시답잖은 일반의 부스러기와는 다르다. 꽃잎은 시들어도 향기는 그대로 남아 부스러기를 털고 손바닥을 펴는 순간 미련처럼 달라붙는다.
 
사람도 늙으면 주름지고 볼품 없이 시든다. 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의 품성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다듬어지고 농익어 고귀함을 더한다. 해당화도 마찬가지다. 꽃은 이미 시들어도 향기는 더욱 익어 맑고 여리게 다가온다.

멍들고 말라 비틀어져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하소연 같은, 그 질긴 해당화 맑은 향(香)에 몸을 맡기고 지긋이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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