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빈 의자 』

일흔너머 2012. 9. 23. 23:19

 

 

아내가 손녀를 돌봐주려고 딸네 집으로 가자 늘그막에 혼자 있기가 불편해 시골로 따라갔다. 낮에는 운동 삼아 한적한 시골 마을 구석구석을 하릴없이 살피며 산책을 하고 밤에는 수박 만한 별들이 바글바글하는 하늘을 쳐다보며 모든 소식을 끊고 산다.


사실 도시에서는 앞뒷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고 살면서 한번도 보지 못한 대통령과 서울 소식에 관심을 가지고 살지만 시골은 다르다. 나라가 어떻든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 만나는 사람이 더 살가운 삶이다.
하늘도 마찬가지다. 도시 하늘은 아무 별이나 용납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녀석은 별 축에 끼지도 못한다. 하지만 시골 하늘은 너도나도 다 별이다. 잔별들도 청천 하늘에 섞여 나름대로 빛나면 된다. 그래서 시골 하늘에는 별이 도시보다 엄청나게 더 많은 것이다.

 
심지어 희뿌연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질러 머리맡에 딱 걸리는 날이면 온갖 풀벌레가 모여 내일은 비가 올까 바람은 어디서 불까 밤새 쑤군거린다. 마음 같아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속에 섞여 밤길을 걷고 한참씩 별을 새고 싶지만 자칫 실수로 길을 잃을까 두려운 나머지 가까운 인근마을과 작은 동산만 돌아다닌다.

 
요즘은 시골이라도 주민복지를 위한 시설이 도시 못지 않다. 어지간한 동산은 산책로를 만들고 가드레일을 설치하고 운동 기구도 준비해 두었다. 심지어 이 동산을 다 오르면 얼마의 칼로리가 소모되고 길은 어디가 가깝고 어디가 먼지 커다랗게 안내판까지 세워두었다.


숲이 잘 다듬어진데다 온통 그늘이라 걷기 딱 좋은 산책로를 하나 찾았다. 집에서 적당히 떨어진 거리라 크게 위험하지도 않고 해서 매일 산책을 하다보니 이젠 정이 들었다.


하루는 산책로 입구에서 몸이 불편해 보이는 노인을 만났다. 거동으로 보아 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불치의 병으로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러 시골로 내려오신 그런 분 같았다. 흔히 말기 암환자들이 공기 좋은 시골에서 요양하는 경우 말이다.


서로 맞닥뜨린 순간 말없이 스쳐 지났다. 먼 산을 보며 혼자 딴 생각을 하다보니 주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건강이 좋지 않으니 세상이 귀찮은 듯 그저 힐끗 쳐다보고는 하던 일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 자리에서 또 그 노인을 만났다. 어제 그냥 지나쳐서 그런지 새삼 말을 붙이기도 쑥스러워 일부러 외면하고 지나쳤다. 나도 노인도 다음날도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습관이란 참 묘했다. 서로 말 한마디 나눈 사이도 아닌데 노인은 언제 비집고 들어왔는지 내 마음 한 구석에 벌써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봄을 맞아 날마다 더 파랗게 돋아나는 떡갈나무 잎을 뜯어 더께더께 덮어놓고 둥근 자리를 마련하여 앉았다가 간 흔적을 봐야만 마음이 놓였다. 다음날은 그 곳을 피해 조금 떨어진 다른 곳에다 새 잎을 뜯어 또 다른 자리를 마련한 걸 본다. 다음날은 또 다른 자리, 그래서 날이 갈수록 떡갈나무 잎으로 만든 자리가 늘어가는 걸 지켜봤다.


사람이 앉아 움푹 들어간 흔적이 남은 떡갈나무 잎은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 푸른색을 잃고 마치 낡은 군복 같았다. 직접 보지 않아도 체취를 느끼지는 못해도 노인이 그랬다는 걸 안다. 어쩌다 마주치면 소나무 그늘에서 갓 꺾은 나뭇가지들을 들고 자리를 찾느라 혼자 서성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뭇잎 자리가 늘어가던 어느 날 소나무 아래에 허드레 판자 몇 토막이 놓이더니 서까래 굵기의 소나무를 기대고 어설픈 의자가 만들어 졌다. 그 의자에는 떡갈나무 잎이 깔려있었고 사람이 앉았던 흔적도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의자 둘레에 나뭇가지로 울타리가 쳐졌다. 푸른 잎이 시들면 또 다른 나뭇잎으로 갈아 덮었다. 연두 이파리들이 차츰 짙은 초록으로 바뀌며 아름다운 봄은 먼 산의 뻐꾸기 울음과 함께 안타깝게 그렇게 흘러갔다.


하루는 산책길이 궁금한지 아내가 따라 나섰다. 초입에서 마침 그 노인을 만났다. 나는 아내에게 노인에 대한 설명을 했다. 아직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매양 지나치며 만나는데 무슨 중병에 걸려 요양을 하는 것 같다고 노인과 한참 떨어져 우리의 이야기가 노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다다랐을 때쯤 일러주었다.

 

아내는 내 말을 듣더니 노인과 관계를 터고 사귀면 낯선 시골에서 말동무가 되고 서로 좋을 것이라고 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척했지만 나름  또 다른 생각이 일었다. 아무리 인심이 좋고 누구나 마음을 터고 지내는 시골이라지만 노인 건강이 저렇게 좋지 않은데 서로 알고 지내다가 노인이 덜컥 떠나면 아픈 내 마음은 누가 위로해 주나. 차라리 지금처럼 소 닭 보듯 그렇게 지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시골 사람들은 바쁘다.
지나고 나면 뭐가 그렇게 바쁜지 세세하게 기억은 없어도 일상은 늘 그렇다. 농사도 그렇고 이웃도 그렇다. 까짓 그냥 둬도 뿌려 논 씨앗은 자라고 하루 이틀 이웃을 만나지 않아도 사람은 살지만 궁금해서 밭에 나가 살피고 습관처럼 이웃을 만나 웃는 것이 사는 재미다. 거기다가 만나고 웃고 헤어지고 울면서 그렇게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올해 여름은 많은 비가 내렸다. 막바지에는 하루도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거기다 태풍이 네 개나 지나갔다. 한동안 산책이 뜸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날이 화창하고 시간이 나 산책을 나섰다. 그리고 산책로 입구에 다다른 순간 내가 그렇게 우려하던 일을 …….


한동안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수사관이 사건 전말을 찾으려고 헤매듯 두리번거렸다. 얼마나 오래 쓰지 않고 팽개쳐졌는지 모르지만 주인 잃은 텅 빈 의자만 소나무에 기댄 채 누렇게 변해 가는 가을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약 노인과 서로 마음을 터고 지냈다면 내가 날마다 나와 앉아 저렇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것도 온갖 나뭇가지가 널부러져 을씨년스럽게 흩어진 비탈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말이다.

 

 

--------------------------------------- 2012. 10. 24. 울타리 안에다 발을 들이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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