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인정(人情) 』

일흔너머 2012. 7. 20. 11:04

 

 

 

이곳 영양(英陽)에는 내 고향과 똑같이 4일, 9일에 오일장이 선다.

 

집사람과 함께 손녀를 데리고 점심때가 훌쩍 지나 느지막이 장을 둘러본다.
직접 기른 푸성귀들을 앞에 놓고 할머니들이 앉아있다. 값을 물으면 천 원 아니면 이천 원이다. 물론 앞에 놓인 것보다 더 많은 덤을 준다.

 

노인들은 그걸 팔아 치부를 하러 나온 것이 아니다. 그저 심심하니 집에서 기른 걸 가지고 나와 장구경이나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몇 천 원 손에 쥐면 그걸로 손자들의 과자 값이나 할 것이다.

 

집사람이 아파트 앞 화단에 뿌리겠다며 상추씨앗을 찾았다. 씨앗 봉지에는 상추가 다 자랐을 때의 먹음직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놓았다. 한참 고르던 집사람은 어느 것이 맛있는 상추인가를 내게 물었다. 마침 여러 가지 상추를 모아서 '모둠 상추 씨앗'이라고 한 것을 찾았다.

 

얼마냐고 물으니 주인 할머니는 마침 짜장면을 크게 한 입 먹다가 미처 말을 잘 못 하겠다는 듯 몇 번 우물우물 씹어서 삼키더니 '이천 원.'한다. 집사람이 돈을 건네자 짜장면 그릇을 땅바닥에 그냥 팽개치듯 내려놓고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더니 뭔가를 주섬주섬 찾는다.

 

처음에는 잔돈을 내줄 일도 없는데 왜 저럴까 의아해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허리춤을 바삐 뒤적이더니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집사람에게 건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입에 남은 짜장면을 씹으며 '아 줘라.'하는 것이다.

 

앉은 채 한 발 내밀며 팔을 뻗어 억지로 건네는 것이다. 집사람은 그 할머니와 조금 떨어져서 동전을 받으면서도 무슨 말인지 똑똑히는 못 들었을 것이다. 그저 오백 원 깎아주는 걸로 알고 받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중간에서 너무 또렷하게 들었다. '아 줘라.'며 몇 번이나 당부하는 소리 말이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 펑퍼짐하게 퍼질러 앉아 짜장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 종일 팔아봐야 돈 몇 천 원 번다고 깎아달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아이 주라'고 덜렁 내놓는 오백 원,
그것은 살아가는 사람의 인정(人情)이다.
 
요즘 TV뉴스에 하루가 멀다하고 회자되는 정치꾼들 이야기,

몇 천만 원 아니 몇 억 원씩 후원금을 받고 나라님 계시는 데까지 시끄럽게 하지만

이곳 시골에서는 뒤 없는 인정이 오가고 아직도 시커먼 짜장면 한 그릇에 삶의 즐거움이 꾸물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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