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스승의 날을 맞아 』

일흔너머 2013. 5. 14. 23:03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가 바쁜지 신호가 한참이나 가고 끊으려는데 그때야 겨우 전화를 받는다.

어디냐고 물으니 고향에 내려와 양봉을 한단다. 아카시아가 한창 개화하여 바쁘기도 하겠다. 며칠 지나면 혹 그 쪽으로 가서 한번 만나자고 다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혼자 친구의 삶을 생각해 본다.

젊은 날,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에 취직하여 높은 봉급을 받으며 생활했다. 그 뿐인가? 전공이 건축이라 도시근교의 발전해 갈 곳을 미리 내다보고 집을 지어 많은 재물을 모았다. 몇 년 전에 퇴직을 하고 다른 기업에서 스카우트해 갈 정도로 능력이 있어서 당진에서 제철소를 건설하는 일을 또 했다. 그 일이 끝나자마자 중동 어느 나라에 연봉 억이 넘는 보수로 두어 해 계약을 하여 지난해에 겨우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또 저렇게 양봉을 한단다.

 

나는 어떤가?

가만히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주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한 달 동안 시름하면 입에 밥이 들어왔다. 봉급은 작은데 다른 사람들 하나 아니면 둘 낳을 때 멋모르고 셋이나 낳아 학원, 과외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렇게 키웠다. 다행히 아이들이 서울의 대학교를 가지 않았고, 다행히 어학연수를 가려는 녀석이 없었고, 다행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내 취직을 해 주었다. 다행히 말이다.

 

돈 모르고 살아도 세월은 흐른다.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머리털이 희어져 생각은 혼자만의 고집으로 채워졌다. 장난처럼 보이던 아이들의 나쁜 버릇이 차츰 미움으로 변했다. 학생이 싫어지면 교사가 떠나야 한다.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집사람의 만류도 있었지만 앞뒤 잴 겨를 없이 짐을 쌌다.

 

말이 좋아 「명예퇴직」,

정년을 6년 앞두고 어쩌면 고통 속에서 헤매다가 홀가분하게 제대한 군(軍)보다 더 속 시원하게 분필을 던지고 뒤돌아 보지 않고 나와 버렸다. 속말로 미련 없이 말이다. 경제적인 것은 차치하고 첨에는 왜 진작 이러지 못 했는가하며 날아갈 것 같았다.

 

젊을 때 많이 벌던 사람은 늙어서도 잘 번다.

친구 중에 약사가 있는데 아직 현역으로 젊을 때나 지금이나 잘 번다. 농으로 언제 퇴직하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정년이 없다. 의사도 그렇다. 심지어 장사꾼도 그렇다. 죽을 때까지 망할 때까지 한다.

 

하지만 선생은 돈과 인연이 멀다.

젊을 때나 나이들어 늙은 지금이나 똑 같다. 다문 몇 푼이라도 돈이 되는 일은 마치 하늘의 이슬 먹고 사는 양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작게 먹고 가는 똥 누는 것이다.

그래도 괜히 마음은 여유가 있다는 듯 웃으며 산다. 지금껏 잘 살았다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모자 』  (0) 2013.08.20
『 우리 동네 장애인 』  (0) 2013.05.22
『 잔차를 타고 』  (0) 2013.05.02
『 빈 의자 』  (0) 2012.09.23
『 인정(人情) 』  (0) 2012.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