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모자 』

일흔너머 2013. 8. 20. 17:05

 

 

 

 

평소 머리에 뭘 덮어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칼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정수리 밑이 훤히 보이는 바람에 어쩌지 못하고 모자를 쓰게 되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자를 쓰려면 자신의 얼굴형에 어울리는 걸 찾게 된다. 백화점이나 상점에 가면 다양한 모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저 이것저것 찾아 써 보고 제일 멋지게 보이는 걸 찾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지간한 상점에서 머리에 맞는 모자를 쉬 찾지를 못했다. 머리 둘레 24인치, 웃기는 이야기지만 가는 여자 허리둘레에 해당한다. 그러니 모자가 마음에 들어 써 보면 머리위에 간신히 얹혀 있거나 꼭 끼어 내 머리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결국 모양이 욕심나 억지로 사오면 그것은 장롱 안에 돌아다니는 거추장스런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는 모자를 직접 만들고 수선하고 세탁해 주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곳을 관심 있게 찾다보니 의외로 집 근처 지하에서 늙은 할머니가 모자를 만들고 있는 걸 찾게 되었다. 그분은 한번 척 보더니 24인치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전문가였다. 모자의 가격도 무조건 오천 원이었다. 수고했다며 더 주어도 받는 법이 없었다. 혹 노인이 가게를 그만 두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한꺼번에 여남은 개를 주문하여 집에다 두고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쓰고 오랜만에 호사를 누렸다.

 

할머니의 모자 모양은 벙거지처럼 생겨서 거의 여름용이었다. 물론 다양하게 만들었지만 내게 어울리는 것이 그랬다. 챙이 크고 둥그스름한 벙거지 말이다. 그러니 여행을 할 때는 더운 동남아는 괜찮지만 추운 겨울이나 도시에서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런데 집사람과 함께 우연히 들른 시장 가게에서 내 머리에 맞는 모자, 그것도 쑥 들어가는 걸 발견하였다. 두말없이 챙겼다. 흔히 일반 노동자들이 쓰는 그런 모양이었는데 편하고 따뜻했다. 만 원이 안 되는 싼 가격에다 색깔도 검정이라 멀리서 보면 까맣게 머리칼이 덮고 있는 것처럼 보여 마음에 들었다. 결국 그 모자는 십년지기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는 필수품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자를 쓰고 실크로드를 다녀오고 타이완, 네팔, 인도까지 누볐다. 대충 짚어도 십년은 넘었을 것이다. 까맣던 모자가 빛이 바래 지금은 내 머리칼처럼 희끗희끗하다. 오랜 세월 함께한 모자, 그래서 편하고 익었다.

 

사람이 뭘 보려면 머리를 돌린다. 그때 돌아가는 머리와 함께 모자는 세상을 볼 것이다. 결국 모자는 여행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함께 여행한다.

 

오늘 우연히 그 모자가 눈에 띠었다. 오랜 세월 함께한 여행의 피로처럼 땟국이 꾀죄죄하게 눌어붙어 있는 채로 말이다. 샤워를 하면서 이왕 몸을 씻는 김에 모자까지 씻는다. 샴푸를 풀어서 모자의 구석구석 내 머리를 감듯 씻는다. 몇 번이나 헹구는 물이 오래한 세월만큼 진하다.

 

모르긴 해도 구정물 속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만난 향수어린 낙타 눈의 그 애절함과 갠지스 강 모래 둔덕에서 꼬리 흔들며 따라오던 들개 무리의 호기심이 한꺼번에 녹아든 것 같다. 이 더운 여름, 겨울 모자를 씻으며 구정물이 흘러가는 걸 지난 날 추억이 녹아 흘러가는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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